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 묘하게 허탈했다는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AI가 초안을 썼고, 자신은 몇 가지를 손봤을 뿐이었다. 결과물은 훌륭했다. 상사도 만족했다. 그런데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뭔가 이상한 감각이 찾아왔다고 했다.
내가 이 일을 한 건지, 그냥 지켜본 건지 모르겠다고.
그날 밤 잠이 잘 안 왔다고 했다.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지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의 문제였다.
AI는 빠른 속도로 인간의 인지 노동을 대신하고 있다. 분석하고, 추론하고, 글을 쓰는 일들이 하나씩 자동화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이 2025년 발표한 미래 직업 보고서는 흥미로운 신호를 보여준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회복탄력성, 리더십, 사회적 영향력과 같은 사회정서적 역량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AI가 분석을 맡을수록 인간에게 남는 것은 판단과 관계, 그리고 감정을 통해 맥락을 읽는 능력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2025년 업무 트렌드 연구 역시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많은 직원들이 시간과 에너지의 부족을 느끼고 있으며, 생산성에 대한 기대 수준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AI는 업무 효율을 높이고 있지만, 동시에 더 빠른 속도와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환경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일을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더 만족스럽거나 덜 지치는 경험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변화는 일의 방식뿐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6명 중 1명이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이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든 메시지를 보낼 수 있고, 수백 명의 근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깊은 감정을 나누는 관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연결처럼 보이지만 연결이 아닌 것들이 많아진 세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심리 상담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지만 비용과 접근성이 여전히 높은 장벽이다. 명상 앱은 일시적인 평온을 제공하지만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 자체를 키워주지는 않는다. SNS는 감정을 표현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대상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좋아요를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지능이 풍부해지는 시대일수록 감정 능력은 더 희소해진다.
이것이 AI 시대의 역설이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근육을 기계에 넘겼다.
AI 혁명은 인간의 지능 일부를 AI에 넘기고 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인간이 길러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이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능력.
앞으로 AI 활용 능력(AI Literacy)만큼 중요한 것은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 즉 Emotional Literacy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것을 감정 근육(Emotional Fitness)이라고 부른다.
근육이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지듯,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고,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은 훈련과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AI가 더 똑똑해질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져야 한다.
산업혁명이 근육을 대체했다면,
AI 혁명은 지능을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남는 것은 감정이다.
우리는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인간의 능력 중 하나가 감정을 이해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넘버앤센스는 감정을 단순히 기록하거나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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